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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에 처음 묻힌 헤론의 삶과 죽음
2007.10.23 11:12:54


헤론(1856- 1890)은 최초로 양화진에 안장된 외국인 선교사이다. 그는 29세 때(1885년6월 21일) 한국에 들어와서 5년 남짓 의료선교사로 일하다가 34세로 삶을 마무리하였다. 그가 임종할 때 가족으로 부인과 두 딸을 남겼다.

    헤론은 영국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14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테네시주 녹스빌에서 장성해서 테네시대학교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초빙받는 영예를 얻었지만 이미 북장로회 한국선교사로 지원을 했기에 교수직을 사양하였다. 헤티와 결혼 후 헤론은 한국으로 바로 들어왔는데, 이미 한국에 와있던 알렌,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진료하였다.

    하지만 겨우 1년여 만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헤론이 언더우드와 합세해서 북장로회를 떠나 감리교 선교사로 일하겠다고 미국 선교본부에 협박성(?) 서신을 보낸 것이다. 당시 제중원의 한 지붕 밑에서 일하던 알렌과 헤론, 언더우드는 모두 20대 후반의 열정에 넘치는 신참 선교사들이었다. 그런데 선임자였던 알렌이 독단적으로 병원을 운영하고 사사건건 헤론의 일에 간섭을 한다고 두 사람이 선교본부에 고소한 것이다. 미국 선교본부가 알렌의 편을 들어주자 차라리 이방 땅에서 거지(beggar)가 되자고 헤론과 언더우드가 서로 한탄할만큼 그 갈등은 심각하였고 지속되었다

    1887년 9월 알렌이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일행을 인솔해서 워싱턴으로 떠나자, 이번에는 갈등의 불씨가 헤론과 언더우드 사이의 관계로 옮겨갔다. 제중원 원장이 된 헤론은 고종의 시의로 3품 참관 벼슬을 제수받고, 알렌이 그랬던 것처럼 외국인들을 치료해서 부수입을 올렸다. 그러면서 헤론은 선교 정책에서 한국 정부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는 유화노선을 취하였다. 따라서 북쪽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가서 세례를 베푸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치던 언더우드가 못마땅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언더우드는 자신을 가나안 12 정탐꾼 중에서 긍정적인 보고를 올린 여호수와와 갈렙과 동일시하면서 헤론의 신중론을 비판하였다.


    헤론의 둘째 딸 제시는 유난히 무더웠던 1888년 7월에 태어났다. 그 해 봄에 부친과 장인이 소천했고, 6월에 영아소동(주1), 7월에 딸의 출산과 부인의 산후 건강 악화, 병원일의 과로, 재정적인 압박으로 헤론은 지칠데로 지쳐있었다.“그리스도를 위해 한국을 얻는다는 희망이 없다면 나는 이곳에 하루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여름 사역은 누구에게나 너구나 힘듭니다.--- 지금 오전 9시인데, 나는 벌써 9명의 환자를 진료했습니다.---나는 쓰러지지를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본국에 돌아간다면 불명예입니다.”

      사실 조선의 환경은 너무나 불결하였다. 천연두로 조선사람의 반이 죽고 사람들은 온갖 질병과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드너라는 오누이 선교사가 당시 내한했는데 이들은 단 두 달만에 나쁜 날씨와 불결한 위생 환경을 이유로 미국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감리교의 로드와일어와 하워드도 질병으로 귀국하였고, 호주에서 온 데이비스목사는 부산에서 전도여행을 하던 중 천연두와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헤론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늘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는라 자신을 혹사시켜야만 하였다. 헤론부인도 너무나 병약해서 동료 선교사들에게 항상 걱정을 끼첬다. 그녀는 한국에서 처음 여성성경공부반을 만들어서 인도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4명은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서로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방까지 불사하였던 헤론과 언더우드의 관계는 1890년 언더우드가 요코하마로 한국어 문법서 인쇄를 위해 자리를 비우면서 서서히 회복되었다. 둘 사이에 화해를 요청하는 서신들이 오가면서 얼음장같던 마음들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우정을 진정으로 확인한 것은 헤론의 병상에서였다. 같은 해 7월에 헤론이 갑자기 몸져 누웠는데 병이 이질로 발전해서 패혈증 증상까지 나타난 것이다. 헤론은 3주간이나 사경을 넘나들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3주간 헤론의 병상을 불철주야 지킨 사람이 바로 언더우드이다. 헤론 자신이 언더우드의 돌봄을 가장 원하였다. 그는 언더우드의 두 손을 잡고 “아, 언더우드, 이제 예전 같구나”. 라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옛 우정과 신뢰를 표현하였다. 헤론은 죽던 날 밤 누군가 물을 주자 이를 거절하고 언더우드에게 달라고 손짓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언더우드 부부는 헤론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에 큰 위안을 받았다.

      헤론은 병상에서 많은 시간을 정신착란 상태로 지냈지만 자주 제 정신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소망에 대해서 분명히 표현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을 깊이 새겼으나, 결코 의심이나 불안, 혹은 자신이나 가족에 대한 후회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 사업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얼마나 더 많이 일하고 싶었는지, 그러나 어떻게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는지 말하였다. 그는 아내에게 한국에 남아서 어린 자녀들을 돌보고 선교사업을 계속 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하인들을 병상 곁에 다 불러모은 뒤 유창한 한국어로 생명의 도를 말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부탁하였다. 헤론은 아무런 보험이나 유언장을 남기지 않은 채 잠자듯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주1)영아소동 : 외국인들이 한국 어린이들을 유괴해서 심장과 눈으로 약을 만들고 외국공사관에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일반대중 사이에 불길처럼 번져 일어났던 소동. 제중원은 이런한 몹쓸(?) 사업의 중심지로 여겨짐. 서양인과 서양의술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불신과 무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


[참고한 책들]
김원모 완역, <알렌의 일기>, 서울 : 단국대학교출판부, 2004.
이만열 옥성득 편역, <언더우드 자료집 1>, 서울 :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전택부, <양화진선교사열전>, 서울 : 홍성사, 2005.
F.H.해링턴, <개화기의 한미관계 : 알렌박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광린역, 서울 : 일조각, 1982.
Gifford, L.D., "John W. Heron," [The Korean Repository], Dec, 1897.

헤론의 묘지와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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