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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이었던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를 통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원래 베델은 영국 <데일리크로니클>지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1904년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베델의 조국인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부동항을 얻는 것이 주목적)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도 일본을 편드는 기사를 싣는 것이 유리했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베델은 양기택,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지사들을 신문의 주간으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을 규탄하였습니다.

또한 대구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간 '국채보상운동'의 지원금총합소로 대한매일신보사는 그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더욱이 1908년 4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보도한 기사를 싣기도 하였습니다.

베델이 이와 같은 일들을 하자 일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온갖 간계를 짜내었고,
결국 베델은 재판에 회부되어 영국 영사관 고등법원에서 6개월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졌습니다. 이후에는 상하이로 끌려가서 3주간 금고형에 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심신이 약해진 그는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소천하였습니다.

1910년 양화진 베델의 묘에 장지연이 지은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일제는 칼로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습니다.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4년이 되어서야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서 장지연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새긴 작은 새 비를 세웠는데 지금 양화진에 있는 비문이 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