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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는 '백정 전도의 개척자'이자 '백정 해방운동의 조력자'로 칭해지는 인물입니다.
무어는 미국 매코믹 신학교 재학 중 언더우드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졸업 후 32세 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꾸준한 노방전도로 사람들을 모아서 곤당골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열었습니다.
학생들 중에 관자골에 사는 백정 박씨의 아들 ‘봉주리 (Pong Choolie)’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봉주리에게서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무어는 박씨를 여러 차례 위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무어가 외국인 한 사람을 박씨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바로 고종의 주치의 에비슨이었습니다. 에비슨은 여러 차례 왕진하면서 정성스럽게 치료해주었고 마침내 박씨는 완쾌되었습니다.
박씨는 왕의 주치의가 짐승 같은 백정을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였고, 세례를 받고 ‘성춘’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에 나오던 양반 교인들은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예배당 앞쪽에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졸랐습니다.
무어가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결국 이들은 따로 교회를 세우고 갈라졌습니다.
한편 신분차별에 설움 당하던? 많은 백정들은 복음 안에 차별이 없다는 무어와 박성춘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3년 후인 1898년 가을에 곤당골 교회는 분리되었던 홍문동 교회와 다시 합하여 백정과 양반이 함께 예배 드리는 중앙교회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백정교회로 불렀습니다.
이후 중앙교회는 1905년 8월에 예배당을 승동으로 옮겨 이름도 승동교회가 되었습니다.

 
장티푸스에 걸렸다 살아난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대의 전신)의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1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백정 신분으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편, 박성춘은 승동교회(곤당골교회)에서 1911년 장로로 안수를 받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3년 후 왕손이던 이재형도 같은 승동교회에서 장로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차별 없는 복음을 직접 경험한 상징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무어의 사역이 거두어들인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던 무어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제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