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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랜턴 대부인 (함께 온 며느리 <스크랜턴 부인>와 구별하기 위해서 대부인으로 불려짐)은 이화학당을 통해서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52세 되던 1884년 미감리회 해외 여선교회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 받고, 이듬해 외아들 내외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처음 한국에 들어와서는 익숙하지 않은 음식과 환경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자신의 집에서 학당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 온 학생들은 버려진 아이들과 첩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낯 선 이방인에 대한 이웃사람들의 불신이 있었지만, 불신이 차츰 사그라지면서 학생들의 숫자는 점차로 불어났고 조정에서도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습니다.

이화학당에서는 한동안은 한국인 남자 선생이 막을 쳐놓고 그 뒤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호기심 때문인지 학생들이 많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1889년 이화학당의 학생 수는 26명으로 늘어났습니다.
1896년에 기포드가 쓴 글을 보면 당시 기숙사생이 47명, 통학생이 3명이고, 평균연령은 12살, 최연소자는 8살, 최고 연장자는 17살이었습니다. 수업은 한글과 영어로 기초과목과 종교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학생들이 한국적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기를,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해서 훌륭한 한국인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1891년에 이화학당장 자리를 로드 와일러에게 물려주고 미국에 안식년을 다녀온 후부터 그녀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전도하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당시 여성 선교사들의 숫자는 아주 적었고, 온갖 벽들에 둘러싸인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일은 여성들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크랜턴은 ‘전도부인’을 조직하여 동역하였습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이 1898년에 쓴 보고서에 보면 모두 8명의 전도부인들이 그녀와 동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전도부인은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스크랜턴 대부인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듣기를 원하여서 각지에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07년 74세 때 쓴 보고서를 보면 이 할머니 선교사의 사랑과 열정은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만약에 열 사람의 선교사가 있었으면 몇 가지 일에만 집중했을 것이고 훨씬 일을 잘 해냈을 것이라고 토로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52세의 늦은 나이에 조선에 들어온 스크랜턴 대부인은 24년 동안 조선 여성들을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76세 때 소천하여 이곳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