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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 학생 신분으로 미국 북감리회 한국선교사로 지원하였습니다. 아내 엘라와 결혼하고 두 달만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일환으로 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시작한 학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학교)이라는 학교명을 하사 받았습니다.

배재학당에는 점차로 복음의 능력이 퍼져서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는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고난 당하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 까지 확장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1887년 10월 아펜젤러는 벧엘이라고 이름 지어진 집에서 감리교 최초의 공중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897년 12월 26일 성탄 주일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벧엘 예배당의 헌당식을 드렸습니다. 이 때 아펜젤러는 10년 전 벧엘에서의 첫 설교를 반복하였습니다.

"나는 성탄절날, 10년 전인 1887년 성탄절에 한국에서 감리교 목사로서 처음 시도한 공식 설교를 되풀이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가로 8자 세로 12자의 한 조그마한 방에서 예배했지만, 지금부터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성별하여 바치려는 이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출판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습니다.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등 일반신문을 인쇄하였습니다.
또한 아펜젤러는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성경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으로 한국을 섬기던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순직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44살이었습니다. 한국에 27살 때 들어왔으니 17년 동안 선교사로 일한 것입니다.
 
 
아펜젤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일평생 교육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아들 아펜젤러 2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일하였으며,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도 이화학당장을 맡아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장이 되어 섬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