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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 가이치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며, 또한 한국정부로부터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은 일본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되기도 전에 이렇게 한국인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다와 그의 부인이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삶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의 젊은 시절은 홍콩에서 대만을 거치는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대만에서 쑨원(손문)의 혁명운동에도 가담하였고 산악지대를 방랑하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던 소다가 어느 날 술에 만취된 채 노상에서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무명의 한국인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고 밥값도 내어 주었습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 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6전 뒤인 1905년, 소다는 은인의 나라인 한국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서울 YMCA 일본어 선생으로 취직하였습니다.

소다는 이 무렵, 수감 중 예수를 믿게 되었다가 풀려 나온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는 41세 때 독실한 신앙인인 30세의 우에노 다키와 결혼합니다.

소다는 105인 사건(1911년)으로 YMCA 동료들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자, 일제의 만행을 공격하면서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힘썼습니다.
이 때 한국인들로부터 감사와 찬사도 들었지만 간사한 일제의 간첩이라는 비방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1921년부터 45년까지 소다 부부는 천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이 사역을 하면서 이들이 겪은 고생과 역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버려진 아기를 업고 유모를 찾다가 구박을 당한 일, 소다의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소다가 취조를 당한 일, 거짓 위선자라고 비방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소다는 일제의 패망 후 홀로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 손에 세계평화라는 표어를, 또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 조국 일본의 회개를 외쳤습니다.

한국에 남아서 고아사업을 계속하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소다는 부인의 부음소식을 듣고도 찬송과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 등의 초청으로 94세 되던 1961년 한국으로 돌아온 소다는 영락 보린원에서 1년 동안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