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선교사처음이야기 > 선교사소개 > 언더우드家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입니다.
선교 초기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그는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양화진 언더우드가의 가족 묘역에는 4대에 걸쳐 모두 7명이 묻혀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언더우드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북한지방으로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가서 그 곳에 있던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세례 신청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로스 선교사와 한국인들에 의해서 만주에서 번역된 신약성경이 북한지방에 두루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더우드는 8살 연상의 릴리아스 호튼과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이들은 신혼여행조차 전도여행으로 다녀올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습니다.
언더우드는 의주에서 세례문답을 통과한 33명의 남자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땅에 가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들 신혼부부는 1600Km 이상을 여행하였고 600여명 이상을 치료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미국으로 돌아가 안식년 기간을 보내는 중에도 강연과 신학교 방문 등을 통해서 직접 후배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에비슨, 무어, 레이놀즈, 테이트, 리 등이 언더우드의 영향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국선교사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언더우드 타자기의 소유자이던 언더우드의 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 John T. Underwood)이 재정을 지원한 덕분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원장으로서의 그 책임을 다 하였으며, 한국에 오게 될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위해서 손수 영한사전, 한영사전, 한국어문법서들을 만들어 직접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 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조선기독교대학'(나중에 세브란스 의대와 합해져서 연세대학교가 됨)를 설립해서 초대학장을 맡는 등 한국 대학교육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언더우드 2세는 아버지를 이어서 조선기독교대학의 3대 교장으로 학교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민간고문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3세도 연세대학교의 교수와 이사로 봉직하였습니다.